여행

워커힐·조선 '양강 구도' 깨졌다…롯데·파라다이스까지 참전하며 피 터지는 '호텔 김치 대전'

 전통적인 숙박 서비스 제공이라는 틀을 깨고, 국내 최고급 호텔들이 때아닌 '김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메뉴를 추가하는 차원을 넘어, 호텔의 브랜드를 건 리테일 사업을 미래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야심 찬 선언이다. 바야흐로 호텔의 이름값을 보고 김치를 고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치열한 경쟁의 서막을 연 것은 단연 워커힐호텔이다. 무려 1989년, 업계 최초로 '김치 연구소'라는 파격적인 조직을 설립하며 김치에 대한 진심을 보였다. 8년간의 연구 개발 끝에 1997년, 전통의 맛을 완벽하게 재현한 프리미엄 라인 '수펙스 김치'를 세상에 내놓으며 호텔 김치의 역사를 시작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8년에는 가격 접근성을 높인 세컨드 브랜드 '워커힐호텔 김치'를 출시, 고급화와 대중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라인업을 완성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조선호텔앤리조트다. 2004년, 웨스틴 조선 서울의 뷔페 레스토랑 '카페로얄'에서 기본 찬으로 제공되던 김치가 "판매해달라"는 고객들의 빗발치는 요청에 힘입어 상품화된, 그야말로 입소문이 만들어낸 스타였다. 이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2011년에는 서울 성수동에 김치 공장을 설립하며 본격적인 대량 생산 체제에 돌입, 현재는 20종이 넘는 다채로운 김치 제품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

 


오랫동안 워커힐과 조선의 '양강 구도'로 이어지던 시장은 2023년을 기점으로 격변기를 맞는다. 롯데호텔이 자체 브랜드(PB) 김치를 들고 시장에 공식적으로 참전한 것이다. 맛김치, 깍두기 등 기본 라인업은 물론, 자사 김치를 활용한 '김치찌개' 밀키트까지 선보이며 단숨에 주요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경쟁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파라다이스 호텔이 지난해 10월, 서울드래곤시티가 올해 5월, 각각 야심 차게 포기김치를 출시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특히 파라다이스 김치는 '카카오 쇼핑하기'에서 진행한 사전 판매 물량이 단 하루 만에 완판되는 기염을 토하며 호텔 김치의 뜨거운 인기를 증명했다.

 

호텔들이 이토록 김치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고물가와 고된 노동에 지쳐 '김장 포기족'이 급증하면서, 간편하고 맛있는 완제품 김치를 찾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왕 사 먹는 거, 더 좋은 것을 먹겠다'는 프리미엄 소비 트렌드가 맞물리며 호텔 김치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호텔 입장에서는 기존의 주방 시설과 전문 셰프 인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추가 투자 비용 없이 사업 다각화와 고객 유입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돈이 되는 사업'임이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조선호텔 김치는 올해 1~8월 매출이 전년 대비 14.5% 증가하며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고 있으며, 워커힐과 롯데호텔 김치 역시 올해 1~7월에만 각각 81%, 21%라는 경이로운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다. 국내 시장의 성공을 발판 삼아 워커힐은 이달부터 미국 수출을 시작했으며, 조선과 롯데 역시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물론, CJ '비비고'나 대상 '종가' 같은 대기업 브랜드가 장악한 시장에서 정면 승부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생산량과 가격 경쟁력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매년 고가 논란에도 호텔 빙수가 완판되는 것처럼, 호텔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통해 '프리미엄 경험'을 판매하는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