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해외 입양 한인들, 과거 기록 조작됐다

 생후 10개월의 어린 아기가 낯선 땅 미국으로 보내진 것은 1982년 3월의 일이다. 이진아 씨는 당시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해 양어머니의 품에 안겨 찍은 낡은 사진 한 장을 간직하고 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성장한 그는 다정하고 편견 없는 양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여름엔 바다를 누비고 겨울엔 스키를 즐기며 비교적 평탄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다섯 살 무렵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후, 그의 마음속에는 한국이라는 미지의 조국과 얼굴조차 모르는 친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그의 일상은 열한 살 무렵 양아버지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게 되면서 크게 흔들렸다. 감정 기복이 극심한 양아버지 밑에서 이 씨는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했고, 결국 5년 뒤 양부모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마다 그는 막연하게나마 한국에 있을 친어머니를 떠올렸다. 비록 자신을 키울 형편이 안 되어 입양을 보냈을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품었지만 태평양의 거대한 장벽은 어린 그에게 너무나 높게만 느껴졌다.

 


이 씨의 입양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해외 입양 절차가 얼마나 허술하고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1981년 수원의 한 보육 시설에 잠시 머문 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이듬해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모든 과정에서 친어머니의 의사는 철저히 배제되었으며, 서류상 그는 그저 '버려진 아이'이자 '입양 가능한 상품'처럼 취급되었다. 심지어 친어머니의 신원과 자신의 정확한 출생일조차 임의로 변경되거나 누락되는 등, 한 인간의 뿌리를 결정짓는 중대한 기록들이 마치 단순한 사업 장부처럼 무책임하게 조작되었다.

 

2002년, 이 씨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고 친어머니와 극적인 재회를 이뤘다. 그러나 놀랍게도 친어머니는 딸이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 잘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만 굳게 믿고 있었다. 짧은 만남 직후 친어머니는 자신의 과거가 현재의 가정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매몰찬 통보를 남겼다. 처음엔 깊은 절망과 혼란에 빠졌던 이 씨였지만, 세월이 흐르며 자신을 떠나보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네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를 즐기고 고향의 정취를 느끼며 두 개의 조국을 모두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씨는 최근 제3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자신의 입양 과정에 대한 진실 규명을 정식으로 신청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뿌리가 뽑힌 수많은 해외 입양인들의 숨겨진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이다.

 

이 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수많은 한국의 친부모들을 향해 진심 어린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입양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부모를 향한 원망이나 책망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낯선 땅에서도 꿋꿋하게 잘 살아남았다는 생존의 안부를 전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입양인과 친부모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